베르나르 베르베르 『영혼의 왈츠』 리뷰|나는 영혼의 진화 어디쯤에 있을까
퇴행 최면과 108번의 전생, 피타고라스와 붓다를 통해 생각해 본 윤회와 자유의지
이야기꾼의 특권 아닐까?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신비로움과 모호함을 도구로 삼아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영혼의 왈츠』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럴듯한 과학과 역사적 사실 사이에 거침없이 상상의 다리를 놓아, 독자로 하여금 ‘정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런 면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최고의 이야기꾼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때 『개미』를 읽은 이후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팬이 되었다. 그 뒤로 오랜 시간 그의 책을 거의 빠짐없이 읽어 왔다.
이야기의 긴장감이나 촘촘하게 짜인 서사의 완성도만 놓고 본다면, 이번 작품 『영혼의 왈츠』를 아주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소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베르베르의 책에는 이야기의 완성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끌림이 있다. 그의 신작이 나오면 나는 결국 읽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 전 읽은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처럼 촘촘한 세계관과 복잡한 인물 관계, 정교한 복선과 긴박한 전개를 기대한다면 베르베르의 소설은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최근 10여 년 동안 발표된 그의 소설에서 나를 붙드는 것은 치밀한 플롯만이 아니다. 이야기를 움직이는 기발한 장치와 그 아래 깔린 유머, 과학과 역사와 철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이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렵게 만든다.
그의 책이 늘 그러하듯.
『영혼의 왈츠』 줄거리: 12만 년의 전생 여행
『영혼의 왈츠』는 『기억』과 『꿀벌의 예언』에 이어지는 판도라 연작의 세 번째 작품이다. 세 작품 모두 퇴행 최면이라는 장치를 활용해 전생과 현생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번 작품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와 호모 사피엔스가 공존하던 12만 년 전부터 21세기 현재까지, 무려 12만 년에 걸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전작들처럼 한 영혼이 여러 육체와 시대를 거치며 인류 문명의 탄생과 발전, 갈등과 파괴를 반복해서 경험한다는 설정이다.
이번 책에서는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르네가 아니라 그의 딸 외제니가 이야기의 중심에 선다. 외제니는 자신의 여러 전생을 탐색하며 현재에 닥친 위기의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아 나간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는 단순한 전생 탐험을 넘어 사후 세계와 영혼의 진화, 운명과 자유의지의 문제로 확장된다.
외제니는 여러 생에 걸쳐 자신과 만나고 엇갈렸던 존재들을 발견하고, 마침내 자신이 찾아야 했던 ‘영혼의 형제’와도 다시 만난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외제니는 세상의 모든 사건과 가능한 미래가 기록되어 있다는 ‘아카샤 도서관’에 도달한다.
그곳에 기록된 미래는 하나로 고정된 미래가 아니다. 인간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의 미래다. 소설이 내내 강조해 온 자유의지가 마지막 공간에서도 다시 확인되는 셈이다.
이것으로 판도라 연작은 끝나는 것일까?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베르베르의 다음 이야기는 언제나 또 다른 문을 열어 주니까.
『영혼의 왈츠』 속 피타고라스와 붓다
이번 작품에서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피타고라스와 붓다가 만나는 장면이었다.
역사적으로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났다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는 베르베르가 만들어 낸 문학적 상상일 테다. 하지만 영혼의 윤회와 정화, 우주의 질서에 관심을 가졌던 피타고라스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친 붓다를 한자리에 만나게 한 발상 자체가 무척이나 베르베르답다.
나는 오래전부터 베르베르의 세계관이 불교와 여러 지점에서 맞닿아 있다고 느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붓다가 이야기 속에 직접 등장한다.
붓다가 등장하는 장면뿐만 아니라 작품 곳곳에서 불교 철학을 연상시키는 문장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불교를 접하고 공부하면서 삶과 업, 인연과 인과에 대해 나름대로 품어 온 생각들이 있다. 소설 속 여러 설정은 그 생각들을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와 현대적인 언어로 다시 바라보게 했다.
물론 베르베르가 말하는 영혼의 윤회와 불교가 말하는 윤회는 완전히 같지 않다.
내 공부가 아직 충분히 깊지는 않지만, 소설에서는 하나의 영혼이 여러 생을 이어 가며 경험을 축적하고 점차 높은 단계로 진화한다. 반면 불교에서는 변하지 않는 영혼이나 고정된 자아가 육체를 바꾸어 가며 이동한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전 생과 다음 생 사이에는 업과 인과의 연속성이 있지만, 그 과정을 관통하는 영원불변의 ‘나’가 존재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또한 불교에서 깨달음은 더 완성된 영혼이 되는 일이라기보다, 무명과 갈애를 소멸하여 괴로움과 윤회를 지속시키는 원인에서 벗어나는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베르베르의 이야기는 내게 늘 흥미롭다.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이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때로는 나의 이해를 넓혀 주고, 때로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한다.
퇴행 최면과 전생이라는 매혹적인 설정
판도라 연작의 중심 장치인 퇴행 최면은 사실 상당히 황당한 설정이다. 책 속에서는 생각보다 비교적 쉽게 행해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기도 한다. 퇴행 최면으로 확인한 전생을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책 속에서도 인물간의 대화를 통해 이런 언급을 한다.
하지만 책을 따라가다 보면 일상에서 가끔 경험하는 기시감과,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이상한 친숙함까지도 전생의 기억과 연결해 보고 싶어진다.
혹시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과 두려움, 이유를 알 수 없는 친밀감에도 오래된 기억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만으로도 평범한 현실이 조금 더 흥미진진해진다.
퇴행 최면의 과학성을 따지는 일은 잠시 미뤄 두어도 좋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 가설을 기꺼이 믿어 보는 것, 그 상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도 그 모호함을 호기심으로 바꾸는 힘. 그것이 베르베르의 이야기를 계속 읽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영혼을 평가하는 세 가지 질문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환생을 거듭하는 영혼이 각 생을 통해 조금씩 진화한다는 것이다. 한 생이 끝나면 천사들이 그 삶을 평가하며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자신의 재능을 어떻게 썼나요?」
「당신은 무엇을 배웠나요?」
「당신은 누구를 사랑했나요?」
마지막 질문은 참으로 베르베르답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삶을 평가한다면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 성취일까, 재산일까, 명성일까.
그런데 베르베르는 재능과 배움, 그리고 사랑을 앞에 두었다.
재능은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것이고, 배움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며, 사랑은 그 주고받음 속에서 다른 존재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 본다.
나는 내 재능을 어떻게 사용해 왔는가.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나는 누구를 사랑했는가.
그리고 조금 더 근원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지금 어디쯤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소설에서는 영혼의 진화 점수가 6점에 도달하면 환생의 의무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영혼을 점수로 평가한다는 발상은 상당히 베르베르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 자체가 아닐 것이다. 한 생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어떤 존재로 변화했는지를 묻는 것이 이 평가의 진짜 의미일 테다.
생각은 어떻게 운명이 되는가
다음 생을 선택하는 영혼에게 천사들은 이런 말을 덧붙인다.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던 문장이다.
당신의 생각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말이 돼요.
당신의 말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행동이 돼요.
당신의 행동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습관이 돼요.
당신의 습관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의 성격이 돼요.
당신의 성격을 조심해요, 그것이 당신 영혼의…… 운명이 돼요.
운명은 완성된 채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쌓이면서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흔히 거대한 결심 한 번이나 인생을 뒤흔드는 결정적 사건 하나로 삶이 바뀔 것이라는 환상을 품는다. 그러나 실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생각과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
귀찮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익숙한 답에도 의문을 품는 것.
쉽게 단정하지 않고 끝까지 답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생각한 바에 따라 조금씩 행동하는 것.
이 작고 반복적인 선택들이 쌓여 한 사람의 성격이 되고, 결국 그 사람이 걸어가는 길을 만드는 것 아닐까.
흔히 ‘업’이라는 단어를 이미 정해진 운명이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처벌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기본적으로 의도를 지닌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이 문장은 업이 형성되는 과정을 현대적인 언어, 혹은 베르베르의 언어로 풀어낸 것처럼 읽힌다.
선한 영혼과 악한 영혼이 따로 있을까
영혼의 진화란 과연 무엇일까.
악인과 선인이 모두 환생을 거듭한다면 우리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다음 문장이 치고 들어온다.
변호사 천사가 쐐기를 박는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없어요. 스스로에게 부여한 사명에 비추어 빠르게 혹은 느리게 진화하는 영혼들이 있을 뿐이죠.」검사가 말끝을 단다.
「영혼들이 비슷한 진화 과정을 겪다 보면 때로 충돌이 불가피해요. 역경이 닥쳤을 때 숨겨진 재능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타락과 악덕이 고개를 들기도 하죠.」
이 문장을 선과 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 사람을 하나의 행동이나 한 시기의 모습만으로 영원한 선인 또는 악인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뜻에 더 가까워 보인다.
누구에게나 선한 가능성과 파괴적인 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 역경을 통해 숨겨진 용기와 재능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고, 두려움과 욕망에 굴복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본래 어떤 부류의 인간이냐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얼마나 반복하느냐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설정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가해와 피해를 모두 영혼의 학습 과정이라고만 설명하면 현실의 폭력과 불평등을 잘못 재단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고통을 그 영혼이 스스로 선택한 과제라고 단정하는 순간, 피해자가 겪은 고통과 가해자가 져야 할 책임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베르의 세계관은 무척 흥미로운 사유의 도구이지만, 현실의 윤리와 책임까지 대신 설명해 주는 절대적인 답은 아니다.
카르마와 자유의지 사이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나온다.
「운명이 미리 써질 수 있는데도 그 경로를 예측할 수 없는 이유를 아직 설명해 주지 않으셨어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자유의지 때문이에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읽어 알고 있겠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세 가지의 영향 아래 놓여요. 25퍼센트의 유전, 25퍼센트의 카르마, 그리고 50퍼센트의 자유의지.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통해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지 정하게 돼요.」
「삶의 게임이 흥미로운 건 바로 이 때문이에요. 각자가 순간순간 어떤 결정을 내릴지 우리는 알지 못해요. 그 결정이 영혼의 진화를 결정하게 되죠.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어요. 선택에 따른 책임도 각자가 져야 해요.」
유전 25퍼센트, 카르마 25퍼센트, 자유의지 50퍼센트라는 비율에 과학적이거나 불교 교리적인 근거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베르베르가 만든 소설적 공식이다.
그럼에도 이 공식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인간을 환경의 희생자로만 보지도 않고, 모든 것을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존재로 과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적절하면서도 무척 현실적인 공식이랄까.
우리는 부모와 시대, 신체와 기질을 선택하지 못한 채 태어난다. 과거의 선택과 인간관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 안에서도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자유의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어떤 태도로 응답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능력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공식이 무척 적절해보인다.
108번의 전생과 불교의 108번뇌
주인공 외제니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로 살았던 때부터 현재까지 108번의 삶을 살았다.
여기에는 이야기상의 작은 장치가 숨어 있지만, 어쨌든 ‘108’이라는 숫자는 불교를 공부해 온 내게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불교에서 말하는 108번뇌와 같은 숫자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의도한 숫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독자인 나는 외제니의 108번의 삶을 인간이 통과해야 하는 108개의 번뇌처럼 읽혔다.
108번의 삶을 지나면서 외제니는 집착하고 사랑하며, 실패하고 후회하고, 때로는 타인을 구하고 때로는 파괴한다.
그렇다면 108번의 전생을 통과한 이번 생에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쟁취한 것일까. 아카샤 도서관에 도달했다는 것은 완전한 깨달음에 가까워졌다는 뜻일까?
불교에서 번뇌를 소멸한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더 이상 지배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그렇다고 깨달은 존재가 육체적 고통이나 세상의 슬픔을 전혀 감각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고통을 경험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거나, 그것으로 새로운 괴로움과 업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외제니는 아카샤 도서관에 도달하면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기보다, 자신의 수많은 삶을 하나의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그것이 외제니가 이번 생에서 얻은 나름의 깨달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피타고라스에게 주어진 ‘베르브’의 삶
외제니의 여러 전생을 살펴보면 무기력하게 현실에 굴복했던 삶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시도와 노력으로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삶도 있다.
어느 생을 마친 뒤 그녀의 영혼은 4.7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고, 일종의 혜택으로 특별한 삶을 선택할 기회를 얻는다. 그것은 자신의 뜻을 충분히 펼치고 주변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출발부터 유리한 조건을 갖춘 ‘베르브’의 삶이다.
그 삶은 긍정적인 영향도 부정적인 영향도 크게 미칠 수 있다. 무조건 훌륭한 삶이 되도록 정해진 것은 아니다.
재능과 권한이 커질수록 세상을 이롭게 할 가능성도 커지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의 위험도 함께 커지기 때문일 테다.
외제니가 선택한 베르브의 삶이 바로 피타고라스의 삶이었다.
피타고라스의 생을 마친 뒤 외제니의 영혼은 6.3점을 받고 환생의 의무에서 벗어난다.
피타고라스의 삶과 고타마 싯다르타의 마지막 생
이 설정을 읽으며 고타마 싯다르타의 마지막 생을 떠올렸다.
팔리 경전 《디가 니까야》 제30경 〈락카나 숫따〉에는 ‘삼십이대인상’이라 불리는 위대한 인물의 신체적 특징이 나온다. 오랜 세월 쌓아 온 선한 행위의 결과로 이러한 특징을 갖춘 사람은 세속에 머물면 정의로운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하면 번뇌를 완전히 끊고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가 된다고 설명한다.
이 전승에서 싯다르타의 특별한 신체적 특징과 출생 조건은 편안한 삶을 보장하는 특혜가 아니다. 오랜 수행과 선한 행위의 결과가 무르익어, 마지막 생에서 깨달음을 성취할 조건이 갖추어졌음을 보여 주는 표지에 가깝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특별한 조건을 타고났다는 사실만으로 저절로 붓다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궁에 남아 전륜성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출가를 선택한다. 극도의 고행을 경험한 뒤 그 한계를 깨닫고 중도를 발견했으며,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사성제와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피타고라스에게 주어진 베르브의 삶과 싯다르타의 마지막 생은 닮아 보였다.
둘 다 오랜 시간 축적된 행위와 경험을 바탕으로 특별한 조건을 부여받은 삶이다. 그러나 그 조건은 성공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특혜가 아니라, 더 큰 가능성만큼 더 무거운 선택과 책임을 요구하는 무대였다.
나는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
내 진화는 어디쯤 와 있을까. 얼마나 완성되었을까.
그런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제 당신은 지난 생을 잊게 될 거예요. 그리고 다음 생의 부모, 출생 장소, 성별, 심지어는 당신의 결점까지도 선택하게 될 거예요.」
「내가 정말로 선택할 수 있어요?」
「그럼요,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당신 스스로 일종의 이상적인 궤도, 다시 말해 운명 같은 것을 정하고 나서 삶을 시작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돼요.」
「하지만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어요. 당신은 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또 다른 장면에서는 왜 영혼들이 편하고 쉬운 삶만을 선택하지 않는지 묻는다.
「편안한 삶이 목표가 아니라 영혼의 진화가 목표이기 때문이에요. 많은 영혼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을 번갈아 살아요. 부자의 삶과 가난한 사람의 삶, 건강한 삶과 아픈 삶, 평화로운 삶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삶, 즐거운 삶과 슬픈 삶, 단명하는 삶과 장수하는 삶, 머무는 삶과 여행하는 삶, 광기에 휩쓸린 삶과 지혜로운 삶. 상반되는 삶을 살아 봐야 배울 수 있는 게 있어요.」
만일 정말로 태어나기 전에 부모와 출생 장소, 성별과 결점까지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왜 지금의 삶을 골랐을까.
내가 가진 재능뿐 아니라 부족함과 상처, 반복되는 어려움에도 내가 배워야 할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물론 이 설정을 현실의 진실처럼 받아들여 누군가의 고통을 그 사람이 선택한 운명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내게 이미 주어진 삶을 원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조건 안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묻는 문학적 장치로는 의미가 있다.
내가 이 삶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이 삶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여전히 나의 몫이다.
내 삶의 GPS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소설은 삶과 자유의지의 관계를 GPS에 비유한다.
「세상에 태어난 당신은 자신의 삶의 경로를 만들어 나가요. 직관, 꿈, 징표, 영매, 고양이 같은 매개를 통해 좋은 방향에 대한 안내를 받게 되죠. 하지만 당신의 자유의지 덕분에, 혹은 자유의지 때문에 그 안내를 꼭 따르지는 않아요.」
「매 순간 선택을 하는 것은 결국 육신이라는 자동차의 운전대를 잡은 저 자신이라는 말씀이죠?」
「당신은 GPS가 일러 주는 길로 갈 수도 있고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어요. 도로 한가운데서 차를 돌려 역주행을 할 수도 있어요.」
이 비유가 마음에 들었다.
목적지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 이르는 길이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한 번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해서 모든 여정이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GPS는 지나간 길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위치에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다시 계산해 보여 준다.
살다 보면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며 너무 멀리 잘못 왔다고 느낄 때가 있다. 되돌아가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현재 위치에서 새로운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돌아가는 길이 멀고 힘들 수는 있어도 새로운 경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삶의 GPS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나는 그 안내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아니면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같은 길을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 생에 걸쳐 추는 영혼의 왈츠
‘영혼의 왈츠’라는 표현은 이야기 속에서 단 한 번 등장한다.
「영혼의 가족은 여러 생에 걸쳐, 때로 자신들의 정신적 유산을 매개로 다시 만나 과거를 청산하고 복수를 펼치기도 해요. 그게 바로 시대를 건너가며 이어지는 위대한 영혼의 왈츠죠.」
12만 년 동안 ‘빛의 다섯 손가락’과 ‘어둠의 다섯 손가락’은 여러 시대에서 만나 싸움을 반복한다. 어느 시대에는 한쪽이 이기고, 다른 시대에는 반대쪽이 승리한다.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힘과 그것을 파괴하거나 억압하려는 힘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 열 명처럼 거창한 문명 간 전쟁이 아니더라도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서로를 사랑하고 돕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고받으며 싸우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성장시키고, 어떤 사람은 내가 외면해 온 모습을 보게 한다. 좋은 관계뿐 아니라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도 때로는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왈츠는 혼자 추는 춤이 아니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한 사람이 앞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이 뒤로 물러난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같은 리듬 안에서 계속 자리를 바꾸는 춤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관계 역시 하나의 왈츠가 아닐까.
어느 순간에는 내가 누군가를 이끌고, 또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에게 이끌린다. 사랑하는 사람과 발을 맞추기도 하고, 서로의 발을 밟으며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배워 간다.
지금 나는 나의 영혼의 가족을 만났을까.
나의 영혼의 형제를 찾았을까.
혹은 알아보지 못한 채 이미 스쳐 지나간 것은 아닐까.
나의 영혼에 부여된 사명
아카샤 도서관에서 건네는 마지막 말 역시 무척 베르베르답다.
「당신의 전생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들의 얘기를 써요. 생을 거듭하며 만남을 이어 가는 영혼의 가족과 영혼의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써요. 당연히 사랑에 대해서도 써야죠.
글을 쓸 때는 한꺼번에 다 쏟아놓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독자들에게 보여 줘 스스로 퍼즐을 맞추게 해요. 독자들 스스로 이해하고 상상하게 만들어요.
당신이 이걸 해낸다면 당신의 영혼에 부여된 사명을 완수한다는 뜻이에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 들렸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써 왔으니, 이제 당신도 당신의 이야기를 쓰라’는 독자에 대한 권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나의 영혼에 부여된 사명은 무엇일까.
나는 오랫동안 개발자로 일해오고 있고, 차를 마시고 공부했으며, 빵을 만들고 글을 쓰고 있다. 작가적 상상력을 추가해서, 지금까지 서로 다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이 경험들이 사실은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오랫동안 배우고 경험한 것을 기록하고,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어 전하는 것.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 데 작은 단서가 되어 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가진 재능을 사용하는 한 가지 방식일지도 모른다.
사명은 어느 날 완성된 문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좋아해 온 것, 힘들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 자꾸만 되돌아가게 되는 것,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것이 하나씩 쌓이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혼의 진화: 성장이 아니라 균형
마지막으로 오래 메모해 두고 싶은 피타고라스의 말이 있다.
「글이 거짓을 퍼뜨리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게. 음악이 인명을 살상하는 군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데 쓰일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게. 과학, 영성, 노예 해방, 남녀평등, 환경 보호, 채식 등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들이 얼마든지 불순한 의도로 악용되어 인류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데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게.
정치든 종교든 과격한 자들에게 지식을 줄 때는 한 번 더 생각하게. 극단주의 정치와 극단주의 종교의 만남은 걷잡을 수 없는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을 명심하고 지식을 전파하게.
모든 형태의 생명을 존중하게.
해답은 성장이 아니라 균형에 있네.
중도와 조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배합을 중시하며 매사를 결정하게.」
불교의 중도와 닮아 있다.
불교의 중도 역시 두 극단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라는 뜻이 아니다. 감각적 욕망에 빠지는 삶과 자신을 괴롭히는 극단적 고행을 모두 벗어나, 집착과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올바른 길을 찾는 가르침에 가깝다.
좋은 가치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과학도, 종교도, 예술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에 따라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타인을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정의와 평등을 위한 가치조차 극단주의와 결합하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공격하는 명분으로 변할 수 있다.
무엇을 믿느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을 어떤 태도와 방식으로 실천하느냐이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일수록, 그 확신이 타인을 해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혼의 진화란 더 강하고 위대한 존재가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의 재능을 세상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경험을 통해 배우며, 사랑하는 법을 익히고, 자유롭게 선택하되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게 된 영혼의 진화다.
퇴행 최면도, 전생의 기억도, 아카샤 도서관도 사실인지 알 수 없다. 영혼이 실제로 점수를 받고 다음 생을 선택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가 허구라고 해도 책이 던지는 질문까지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재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묻는다.
나는 지금, 나의 영혼의 왈츠에서 어느 장면을 지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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