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김진명 『세종의 나라』를 읽고|너무 익숙해서 미처 몰랐던 한글의 가치

김진명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였다.

소설을 거의 읽지 않던, 아니 읽기를 거부하던 학창 시절이었음에도 이 작품만큼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작품이라 도대체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1990년대에 출간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게도 그러했다. 책을 읽는 동안 속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록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듯했다.

그로부터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로서 느끼는 것은, 김진명 작가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탈을 쓰고 있지만 늘 역사 속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에도 유효한 시대적 질문 혹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 『세종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정확히 말하면 한글이 만들어진 과정만을 다룬 소설은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 담긴 세종의 마음, 글을 몰라 자신의 억울함조차 표현할 수 없었던 백성을 향한 연민, 그리고 새로운 글자를 통해 세종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K의 시대, 다시 바라보는 한글

요즘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K’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시대가 되었다.

K-팝, K-드라마, K-영화, K-푸드, K-뷰티까지.

대한민국의 문화는 이제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시대다.

1990년대에 십 대 시절을 보낸 나에게 대한민국은 지금처럼 세계 문화의 중심에 가까운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서구 문화나 일본 문화를 동경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은 개발도상국이라는 인식이 더 자연스러운 시기였다.

그런 시대를 기억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오늘날의 변화는 낯설고도 무척 놀랍다.

그리고 그 문화적 확장의 바탕에는 우리의 말과 글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글만으로 인해 이렇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글이 가진 정신이, 그 정신에 기반을 둔 우리의 문화가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래서일까.
김진명 작가가 이번에 선택한 주제가 세종대왕과 한글이라는 점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너무 익숙해서 의심했던 한글의 우수성

학창 시절 우리는 한글이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라고 배웠다.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자음을 만들었고, 하늘·땅·사람의 원리를 바탕으로 모음을 만들었다는 설명도 들었다. 배우기 쉽고 표현력이 뛰어난 문자라는 말도 반복해서 들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설명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학년이 올라가고 여러 외국어를 배우면서 한글이 얼마나 익히기 쉽고 사용자 친화적인 문자인지를 온몸으로 경험하기는 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남아 있었다.

“한글이 우수하다고 말하는 건 우리끼리만의 평가 아닐까?”
“다른 나라 문자도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훌륭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한글의 가치는 단순히 구조의 과학성에만 있지 않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혁신적이고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문자가 만들어진 목적이다.

세종은 지배층의 지식을 공고히 하거나 본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문자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글을 배우지 못한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삶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고자 했다.

한글은 처음부터 ‘백성을 위한 문자’였다.


글을 독점한 시대와 그것을 깨뜨리려 한 왕

『세종의 나라』에는 글을 아는 소수의 선비가 대다수의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소설 속 세종을 둘러싼 대부분의 권력자는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며, 글자를 만들려는 세종이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려 한다며 세종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까지 한다.

그들에게 글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 속 인물은 말한다.

“글을 모르면 예를 모르고 예를 모르면 사람의 도리를 알 수 없사옵니다. 본시 글이란 배우기가 어려워 모든 백성이 이를 배울 수는 없사옵니다. 하여 글을 아는 소수의 선비가 경을 익히고 익혀 백성을 이끄는 것은 천리이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논리다.

하지만 그 전제 속에서 백성은 영원히 그 권력자들에게 ‘배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남는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타인의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휘둘릴 수 밖에 없고, 자유의지라는 건 있을 수가 없다.

세종은 바로 이 구조를 바꾸려 했다.

그것은 단순한 문자 창제가 아니라, 지식과 권력의 구조를 흔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외롭고 위험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살려주시오” 를 쓸 수 있는 권리

이 작품에서 내게 가장 강하게 다가오는 장면은 글을 몰라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하는 백성들의 현실이었다.

책 속 세종은 절규하듯 말한다.

세종은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해 살점이 뜯겨 나가도, 관아에 소장 하나 쓰지 못해 벙어리 냉가슴만 앓다 죽어가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글을 몰라 제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지 못하고, 글을 몰라 노비로 팔려 가도 항변 한 번 못 하는 그 피눈물을 너희는 정녕 모른단 말이냐!”
전각이 떠나갈 듯한 일갈이었다.
“살려주시오.”
이어진 세종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떨렸다.
“이 한마디! 고작 살려달란 이 한마디를 적지 못해 죽어가는 백성을 보고만 있을 것이냐! 그대들이 읽는 성현의 도리가 고작 백성을 벙어리로 만드는 것이더냐!”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한 그 시대의 질서를 꿰뚫어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종의 통찰은 놀랍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실제로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을 만큼 놀랍고 마음이 벅차오른다.

소설에는 고문을 당하고 억울하게 죽을 위기에 놓은 여인이 관청에 소지(所志), 즉 청원서를 올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관리들은 청원의 내용보다 먼저 빼어난 필체와 문장을 보고 그녀가 사대부 집안 출신일 것이라 짐작한다. 물론 소설 속 트릭이 있지만 밝히지 않는 것으로 하자.

“글을 알아도 제대로 아는 여인이다. 사대부 댁 출신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글인데 목사가 어찌 이런 짓(고문과 사형을 말하는 것이다)을 저질렀단 말이냐?”

같은 억울함을 호소하더라도 누가 어떤 글로 작성하느냐에 따라 판단을 내리던 세상이다.
하물며 글을 갖지 못한 백성들은 그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살려주시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이 한마디조차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세종에게 문자는 단순한 학문의 도구가 아니었다.
세종은 백성에게 글자를 준 것이 아니라, 말할 권리와 기록할 권리를 준 것이다.

소설 속 세종은 자신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했던 신하들조차도 처벌하기보다 설득해 함께 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슴 저린 질문을 던진다.

“왜도, 여진도, 몽고도, 안남도, 거란도, 토번도, 심지어는 유구琉球도 모두 자기들만의 고유한 문자가 있소. 그런데 유일하게 우리 조선 백성들만은 문자가 없소. 왜 우리만 글자가 없는 것이오?”


관찰은 눈이 아니라 마음의 일이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또 하나의 문장은 ‘관찰’에 대한 설명이었다.

관찰은 단순히 본다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었다.
무엇을 보려는 욕심도, 무엇을 알고자 하는 기대도, 심지어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조차 모두 내려놓아야 했다.
네 글자의 뜻을 좇는다면서도 이미 마음속에서 답을 정해두고 있었다.
관찰은 눈의 일이 아니었다. 마음의 벽을 걷어내는 일이었다.

이 문장을 읽으며 한글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도 떠올랐다.

우리는 한글을 너무 오래 아무렇지 않게 사용해 왔다.
그래서 더 이상 특별하게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로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한글이 왜 만들어졌는지.
그 문자가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능하게 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K-문화의 시대, 한글의 위상도 달라졌다

오늘날 한글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K-콘텐츠를 통해 한국어를 배우고, 한글 자체를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는 모습도 이제 그리 낯설지 않다.

과거에는 우리가 세계의 문화를 배우는 입장이었다면, 이제 세계 곳곳에서 우리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한글의 높아진 위상을 단순한 자부심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유는 ‘우월함’이 아니라 절실한 ‘필요’였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기록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만든 문자였다.

따라서 한글의 본질은 우월성이 아니라 포용성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글자가 아니라 그 정신이다

『세종의 나라』를 읽으며 한글이 새롭게 보였다.
늘 사용하던 익숙한 문자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글을 쓰고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글을 쓸 수 있다고 해서 모든 목소리가 동등하게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한글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 많은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어려운 지식을 쉽게 나누는 것.
약자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우리의 말과 글이 혐오와 거짓을 퍼뜨리는 도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얻은 만큼, 그 글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책임도 함께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아름답게 만들어진 우리의 말과 글이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데 더 많이 쓰였으면 좋겠다.

한글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를 자랑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문자가 만들어진 이유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한글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너무 익숙했던 글자를 다시 바라보다

『세종의 나라』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지만, 결국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지식은 누구의 것인가.
글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세종은 새로운 문자로 그 질문에 답했다.

백성이 쉽게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글자.
억울한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남길 수 있는 글자.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기록할 수 있는 글자.

우리는 지금 그 문자를 너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K-문화가 세계의 중심으로 확장된 지금, 우리는 비로소 한글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말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적 혁명이다.

『세종의 나라』를 덮으며 생각했다.

너무나 익숙해 그 가치를 잊고 살았던 한글.
그 문자를 아무런 불편 없이 읽고 쓰는 오늘의 일상이 새삼 귀하고 벅차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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