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고

코로나 즈음부터이긴 하지만 최근에는 더더욱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줄었다. OTT 덕이다.

편안하고 쾌적하게 집에서 얼마든지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다 보니 영화에 대한 기대도 함께 줄었다. 아니, 어쩌면 극장에서 보는 영화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높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내 시간과 비용과 에너지를 써가면서까지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기대할 만한 영화가 많지 않아지고 영화관을 가는 횟수는 더 줄어들었다. OTT가 장사를 너무 잘하는 건가. 우리 집 현관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더라.

그런 나를 오랜만에 다시 극장으로 불러낸 영화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였다.

벽돌책, 차마 끝까지 완독하지 못한 오디세이. 그렇지만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숱하게 들어와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오디세이. 십 년간의 트로이 전쟁과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 주인공 오디세우스와 현명한 페넬로페, 환상을 자극하는 키클롭스와 세이렌, 그리고 이타카로 돌아가는 아주아주 기나긴 여정.

그런데 이 익숙한 이야기로 국내에서도 벌써 천만 관객이라니 도무지 안 나가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극장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큰 기대는 없었다. 신화 속 그 이야기에서 뭐 그리 크게 벗어나겠나 싶었다. 크게 벗어나기도 쉽지 않은 게 신화 고전 아니겠는가. 아니, 실은 그래도 천만 관객이면 어마무시한 변주가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페넬로페를 주인공으로 한다던가 뭔가 새로운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닐까. 괜히 천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그런데 결론은, 변주가 크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감상문을 남겨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 잊고싶지 않을만큼 감동이 컸다는 것.

무려 세 시간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긴장감을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의자가 출렁이는 4D로 봐서 그런가. 큰 화면에서 밀려오는 바다와 전쟁 장면은 두려움과 함께 웅장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믿고 보는 맷 데이먼도 좋았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앤 해서웨이가 페넬로페라니.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인터스텔라》에 이어 놀란과 세 번째로 만난 앤 해서웨이가 이번에는 페넬로페라니, 그것만으로도 반가웠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내게 남은 것은 그 화려한 화면 너머에 서 있던 한 인간, 오디세우스였다.


그들에게도 문명은 있었다

영화 속 그 시대는 야만의 시대처럼 보였다.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운다. 패자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승자는 뺏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신들이 개입한다. 긴긴 전쟁과 긴긴 귀향길에서 오디세우스는 어쩔 수 없이 참전하였지만 신들의 뜻과 운명에 끊임없이 맞선다. 자신을 위해서, 자신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는 부하들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가 있는 이타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런 무자비한 세계 속에서도 그들에게는 엄연한 문명이 있었고, 그 문명을 유지하는 규칙이 있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접하라.

이 얼마나 간단명료한 진리인가.

영화에서는 이것을 반복해서 ‘제우스의 법(Zeus’s Law)’ 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낯선 여행자와 손님을 받아들이고 먹이고 보호하는 것, 그리고 손님 역시 자신을 받아준 집과 주인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오랜 시간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을 내치지 못하고 숙식을 제공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제우스의 법을 모두 지키기 때문에, 위대한 문명은 유지되고 있었다.

문명이라는 것은 결국, 무언가 거창하고 멋드러진,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련된 무언가가 아니라 모두가 같이 지키는 이러한 신뢰와 약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문득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서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 속에서도 인간 세상에 다시 해가 뜰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선의지’ 때문이다’라고 하셨던 글이 생각이 났다. 나 역시 인간이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선의에 대한 서로의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인간에게 아직 선의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 마음.
그리고 나 역시 그 믿음을 이용하거나 저버리지 않으려는 의지.

문명이란 영화 속 페넬로페의 말처럼 돌과 벽이 아니라, 이러한 믿음 위에 세워지는 것일테다.

“The structure’s nothing without people’s respect for its meaning.”


선물을 무기로 만든 사람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바로 그 믿음을 깨뜨리는 사람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디세우스. 십 년 동안 무너뜨리지 못한 트로이 성을 단 하나의 기발한 계략으로 무너뜨린 뛰어난 지략가 오디세우스. 그리고 트로이목마. 내게 오디세이는 딱 이 정도의 의미였다. 그런데 놀란은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었다.

목마는 ‘선물’이었다. 그리스인과 트로이인 모두가 숭배하는 여신 아테나에게 바치는 선물. 그리스군은 물러난 척하고 거대한 목마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선물’이 선물로 보이기 위해 목마 안의 병사들이 숨죽여 기다리는 시간을 공들여 보여준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것을 전쟁이 끝났다는 표시이자 신에게 바치는 선물로 받아들여 자신들의 성 안으로 들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 믿음이 무기가 된다.

성문을 통과한다.

밤이 된다.

선물 속에서 군인들이 나온다.

성문이 열린다.

그리고 도시가 불탄다.


전쟁은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트로이 전쟁 자체도 이미 환대의 규칙을 깨뜨린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의 손님이었다. 그런 그가 주인의 아내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돌아간다. 손님이 주인의 환대를 배신했다. 그 배신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고 십 년의 전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전쟁을 끝내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다시 한 번 환대와 신뢰의 규칙을 이용한다. 배신에서 시작된 전쟁이 더 거대한 배신으로 끝난 셈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한 일을 이렇게 고백한다.

“We violated all that’s ever sacred between people.”

이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전쟁 영웅이 할 이야기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그 때 내 마음속 깊은 데서 도사리고 있는,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서 불편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그 느낌, 그 생각들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누가 누군가를 죽이는 전쟁이 용납되는 것인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아니, 도대체 한 번 무너진 믿음은 다시 회복될 수 있기는 한 건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고,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우리는 과연 오디세우스만큼 고민하고 있는가.


영웅이라는 이름 뒤에 남겨진 것

우리는 오디세우스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누구보다 영리하고 누구보다 살아남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영웅이라는 이름 뒤에 남겨진 짐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자신의 계략 하나로 도시가 불탔고, 자신을 믿고 전쟁터까지 따라온 동료들은 모두 죽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속였고, 누군가를 죽였고, 때로는 누군가를 버려야 했다. 물론 그가 원해서 시작한 전쟁은 아니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세계, 죽여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세계 그 안에서 과연 그에게 다른 선택이 있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 남겨진 고뇌의 무게가 가벼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

『오디세이아』는 사실 귀향 이야기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가는 이야기. 사랑하는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돌아가는 이야기. 물리적, 지리적으로 얼마 안 되는 그 거리를 십년에 걸쳐서 힘들게 힘들게 돌아가는 이야기.

왜일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돌아가기를 두려워했다.
그는 그의 문명을 파괴한 장본인이니까.

어찌보면 당연한게 아닐까.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자식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멀리 찾을 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 주변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영화 후반의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를 두고 결국 이렇게까지 말한다.

One man’s idea, one man’s trick… to break Zeus’s Law for ever.
The breaking of Zeus’s law is spreading like a plague.
Our age of bronze is collapsing.

한 시대가 끝나고 있었다. 그들이 믿었던 문명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문명에 결정적인 균열을 낸 사람이 문명을 지키기 위해 싸운 영웅 오디세우스였다.


문명을 지키기 위해 문명을 파괴한 사람

제우스의 법을 무너뜨리고 승리한 세계는 이전과 같은 세계일 수 없을 테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해야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리고 상대가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 역시 규칙을 지킬 이유가 사라지니까.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기 시작하면 화려한 궁전과 높은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도 문명은 이미 무너진 것이 아닐까.

영화속 암흑 시대는 이렇게 오고 있었던 것이다.

“Everyone in Sparta is talking about a coming catastrophe,
an age of darkness brought on by people from the sea violating Zeus’s law.”


오디세우스를 다시 보게 되다

영화 《트로이》에서 보았던 그 멋진 아킬레우스나, 영웅 오디세우스의 화려한 장면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놀란은 철저하게 오디세우스 한 사람을 외롭게 따라갔다.

나는 오디세우스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천 년 넘게 지난 지금도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트로이 목마를 생각해낸 영리한 영웅. 십 년 동안 바다를 떠돌다 마침내 아내에게 돌아간 사람. 그런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아니라, 문명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스스로 문명의 규칙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자신이 과연 돌아갈 수 있는 인간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 그렇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의 무게를 짊어지고, 어떻게든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 했던 한 사람, 그리고 마침내는 그 무게를 제대로 짋어지고 전우들을 기리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는 한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페넬로페와의 약속을 20년만에 지키기 위해 같이 서쪽으로 떠나는 한 사람.

천 년도 더 전의 이야기가 현대의 나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틀에 박힌 말이지만, 천 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아.

이제 정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제대로 끝까지 읽어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공식영상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